20년 넘게 묵은 조세소송이 있다고? 해외 토픽이 아니다. 선진 법치국가라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GS칼텍스, KSS 해운 등이 2004년에 부과받은 법인세 부과처분 취소소송이다. 이렇게 해결의 기약 없는 이유는 우리 최고사법기관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의 갈등이다. 다름 아닌 한정위헌결정의 효력을 둘러싼 권한다툼이다. 사건을 들여다보자. 이 사건의 발단은 무려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990년 재평가세법의 개정이다. 특례 조항을 두어 법인이 상장할 것을 조건으로 붙여 법인이 자산을 재평가하면 재평가차익에 대한 법인세 대신 낮은 세율의 재평가세만 부담하면 되도록 한 것이다.
기업의 상장 촉진을 위한다는 취지로서 주식시장의 경제 여건에 따라 차질이 여러 차례 상장유예 기간이 여러 차례 연장되었다. 그러다 10여 년이 지난 2003년 하반기 당국은 돌연 그 연장을 불허하였다. 그로 인해 상장을 하지 못한 여러 법인들이 무더기로 추징당하게 되었다. 그중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은 우여곡절 끝에 2013년 상장하지 못한데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받아 대법원에서 최종 구제되었다. 상호회사인 보험회사의 특성상 제기된 계약자 보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아 당국이 보험회사 상장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을 정당사유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GS칼텍스 등은 이러한 정당사유를 인정받지 못했고 그 대신 과세 근거 조항의 효력 여부가 법리적 쟁점이 되었다.
구 조세감면규제법이 전문개정되면서 미상장 시 법인세를 추징하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 개정 부칙 제23조가 그것이다. 대법원은 전문개정 시 개정 전 법령의 효력에 관한 종전의 태도와는 달리 이 사건에서는 위 부칙조항을 유효하다고 판단하여 국세청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사건의 헌법소원을 제기받은 헌법재판소는 대법원과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과세당국의 부과근거가 된 부칙 제23조에 대하여 이를 실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이른바 한정위헌결정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에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대법원은 종전의 견해대로 한정위헌결정은 기속력이 없으며 따라서 재심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다시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재심청구를 기각한 대법원 판결과 원부과처분의 취소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1995년 헌법재판소에서 판결취소와 원처분취소까지 이루어져 결국 국세청의 처분취소로 종결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무려 9년 만에 결론을 내어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였을 뿐 원과세처분은 취소하지 않았다. 1995년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의 심판대상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법원 판결일 뿐이어서 원과세처분은 처분을 취소할 직접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재판관 7인 다수의견). 오로지 재판관 2인만이 구제를 위하여 원과세처분을 취소하여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이 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원과세처분을 취소하였더라면 앞서 본 전례에 따라 어쨌든 해결되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판결취소만으로는 권리구제가 되지 않을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납세자에게 립서비스만 한 셈이 되었다. 소송제기 18년 만에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지만 원과세처분취소 문제로 다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에 핑퐁 게임이 재현된 것이다. 납세자로서는 재판취소에 따라 대법원에 재심청구를 했지만 종전의 판례대로 기각할 것이고, 이 사건은 다시 원과세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의 형대로 헌법재판소로 넘어 갈 것이다. 이러한 유례없는 국가 사법의 사각지대와 재판의 초장기화는 해묵은 논쟁인 헌법상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권한분장 불명확, 헌법재판소법의 입법미비, 혹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이기적 권한 다툼 탓이지만 정녕 국가시스템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번에는 국민권익위원회가 나섰다. KSS 해운의 고충민원을 접수한 국민권익위원회는 사건의 중대성과 특이성을 고려하여 헌법학자, 세법교수 등이 참여한 공청회까지 열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대립하여 해결이 미궁에 빠진 사건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다. 고충민원은 과세처분을 비롯한 행정처분은 그 구제를 위한 불복절차와는 달리 국민고충처리의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처분청에 대하여 시정권고를 하거나 의견표명결정을 할 수 있다. 다만 그 결정은 권고적 효력을 가질 뿐 처분청을 강제할 수는 없다. 존중의무를 부과할 뿐이다. 국민권익위원회의 고충처리 대상에서 재판 등 불복절차에 계류 중인 사건은 제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권익위원회는 이 사건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대법원, 헌법재판소의 종국적인 판단이 있었고 그 해결을 바로 기대할 수 없는 이상 고충민원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접근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심리 끝에 대법원, 헌법재판소의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지는 않고 처분을 둘러싼 권리구제의 문제점과 권리구제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처분청에 의견표명결정을 하였다. 그 내용은 처분을 취소하되 환급가산금(긴 쟁송기간으로 처분세액의 80% 이상) 지급은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납세자와 국세청이 각 절반쯤 양보하는 타협적인 방안이었다. 20년의 조세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고육책이었다. 그 방안이 실행되는 경우 납세자는 물론 또 다른 대립 당사자인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내심 반길 절묘안이기도 하였다.
언론에서도 이 결정으로서 해결의 실마리가 생겼다고 전망하여 이제 20년 넘은 조세소송이 막을 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의견표명결정은 처분청(종로세무서장)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국세청에 대한 것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국세기본법 제81조의 16은 국세청장에게 납세자보호의무를 직접 지우고 있고 그 업무를 지원할 납보관, 납세자보호위원회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세청은 여느 고충민원 사건과 같이 처분청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다. 건성으로 서울청 납보위를 거쳤지만 결론은 불수용이었다. 처분청의 불수용 의견 이유는 아직 헌법재판소의 재판취소에 따른 재심 계류 중이고 법원의 조정결정이 아닌 한 권익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이에 대하여 재차 수용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으니 재차 거부하였다.
여기에서 사건을 되돌아보자. 헌법이나 법률의 흠결이 있다고 하여 20년이 넘도록 납세자의 조세소송절차가 종결되지 않는 국가시스템은 도대체 무엇이며 누가 이를 풀어야 하는가? 이 사건에는 국세청,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등 여러 국가기관이 관여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조세부과는 국세청 소관으로 조세를 부과, 징수하고 취소할 권한을 갖는 대민기관이다.
조세에 관한 권리구제는 사법기관이 있지만 국세청은 과세전적부심, 이의신청, 심사청구 등 내부 구제절차를 두고 있고, 고충처리절차도 따로 두고 있다.
납세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도 국세청이다. 사법절차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이 사건 해결의 열쇠를 국세청이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민권익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한 국세청은 자신들의 책무와 직분을 외면한 채 강 건너 불을 보는 듯하다. 납세자가 어떠한 고통을 얼마나 받든 나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인가? 목민관이라는 공복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책임의식과 배려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권익위원회 결정은 현재로서는 사건 해결에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담당 세무공무원이 이 결정에 따른 경우 업무 감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도 있다. 세수의 측면에서도 납세자의 양보로 처분취소액의 80%는 환급가산금이 절감되는 방안이다. 이는 잘 차려진 밥상을 보지도 않고 걷어 찬 형국이다. 국세청이 그 해결을 사법기관에 마냥 미룬다고 과세처분이 적법한 것으로 확정되어 해결이 될까? 국세청이 더 잘 알 것이다.
“국민이 편안한, 보다 나은 국세행정”을 내세우는 국세청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고심어린 결정에 대하여 정작 청 차원에서 그 수용 여부에 대한 내외 전문가의 의견만이라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일선 처분청을 내세워 방패로 삼는 것도 위신에 맞지 않다. 납세자로부터 신뢰받는 세정, 선진 납세문화 조성을 바란다면 결자해지로서 국세청이 나서서 풀어야 한다. KSS해운의 창업자인 박종규 고문은 1993년 설립된 (사)바른경제동인회를 이끈 모범 경제인이다. 올해 90세인 그는 노후에 옮겨 간 제주 서귀포에서 아직도 길고 긴 조세소송의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다.